강동원 (2.5D 위주)

[검은 사제들] 저주

£루네이트 2015. 12. 21. 21:52




 수감번호 4904번, 면회입니다.




 비릿한 쇳소리를 내며 견고하던 철장이 열렸다. 규칙적으로 돌아가는 교도소에서 유일하게 규칙을 깨는 시간이 있다면 그것은 외부로부터의 방문, 즉 면회 시간뿐이다. 역시나 면회를 알리는 소리와 함께 절제된 제복만큼이나 무감각하게 다려진 얼굴의 교도관이 문을 열었고, 그는 수감번호 4904번을 바라보았다. 바닥은 뼛속이 시릴 만큼 냉골이지만 창문을 넘어오는 햇빛은 완연한 봄기운을 담고 있기에 창가에 앉아 낮게 기도를 읊고 있던 수감번호 4904는 조용히 덮었던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자연광을 받아 금빛으로 빛나는 황갈색의 눈동자는 마치 거대한 범을 연상시켰다. 쓸데없이 날 찾아온 인간은 누구냐 라고 작게 구시렁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꼿꼿이 허리를 피는 자세에서는 단단한 기백이 풍겨졌다. 껄껄해진 입 안을 달래줄 담배가 있으면 좋으련만. 아쉬움에 입가를 매만지며 교도관을 뒤따르는 이는 수감번호 4904번, 김범신이었다.



 그날, 죽은 줄로만 알았던 영신이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그렇기에 범신의 죄목은 살인죄에서 살인 미수죄로 바뀌었다. 숨겨진 이면을 보지 못하는 일반인들이 내린 당연한 결론이었다. 하지만 깨어난 영신의 필사적인 항변과 박교수의 해명, 결정적으로 대량의 피를 흘렀는데도 너무나도 멀쩡한 영신의 신체 결과에 범신은 살인 미수죄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다. 물론 공범으로 묶인 준호 또한 마찬가지였다. 큰 사건을 해결하고 범신과 준호는 각자의 삶으로 돌아갔다. 교단의 눈 밖에 났지만 꿋꿋하게 구마사제로서 활동할 범신, 그리고 건실한 자세로 남은 7학년을 마쳐 사제서품식을 받을 준호. 그렇게 각자 평화롭게 지낼 줄만 알았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꼬인 건지 구마를 진행하던 중에 부마자가 피를 토하며 죽어버렸다. 완벽하게 구마를 끝낸 것이 아니었다. 중간에 갑작스레 악령이 사멸하며 동시에 부마자가 죽어버린 것이었다. 부마자가 뱉은 질척한 핏덩어리가 범신의 입가에서 목으로, 가슴으로 천천히 흘러내렸다. 뚝뚝. 기분 나쁘게 진동하는 썩은 내. 이를 발견한 가족은 당연한 수순으로 범신을 신고하였고, 범신은 징역 4년형을 선고받게 되었다.




 면회 시간은 15분입니다.




 이렇게 범죄자가 된 범신을 오랜만에 찾아온 이는 단정하게 수단을 차려입은 최준호였다. 말없이 크고 말간 눈을 올려 자신을 바라보는 준호의 시선에 범신은 진심으로 담배를 피우지 못하는 걸 아쉬워하며 자리에 앉았다. 아주 초반에 톡 건들면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눈물을 머금은 눈으로 신부님, 신부님 불렀던 그 어린 핏덩이가 어느덧 번듯한 사제가 되어 눈앞에 앉아있었다. 그래봤자, 여전히 자신에겐 어린 핏덩이지만.




 무슨 일로 날 찾아 왔냐? 쓸데없이.


 신부님이 보고 싶어 왔죠. 저 며칠 전에 사제서품식을 받았습니다.


 안다. 안 그래도 얼마 전에 학장신부가 와서 네 이야기하고 갔다. 얼마나 말이 많던지.


 그렇습니까? 저도 이제 어엿한 신부네요. 신부님.


 핏덩어리 주제에, 우쭐거리지 마라. 아직도 내 눈에 네가 애새끼다, 애새끼.


 저 애 아닙니다. 올해 전 서른이라고요.


 이제 막 서른이면서 내 앞에서 까부냐?


 까불긴요, 신부님이 자꾸 저를 핏덩이 핏덩이하시니 제 나이 잊으신 줄 알고 알려 드린 거죠.


 하여간… 그 말대꾸는 여전하네.


 신부님도 여전하시네요.




 초승달을 그리며 희게 웃는 얼굴은 뭇 여성들의 마음을 흔들 정도로 아름다웠다. 누가 몰몬교 아니랄까봐. 픽 웃고선 찬찬히 준호를 살펴보는 범신의 눈동자에 문득 비뚤어진 로만칼라가 들어왔다. 부드러운 정적 사이를 예리하게 파고드는 묘한 섬뜩함. 곧장이라도 손을 뻗어서 고쳐주고 싶지만 닿을 수가 없다. 반사적으로 범신은 조용히 기도문을 읊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낮게 읊는 기도문 소리에 준호는 천천히 웃는 얼굴을 굳혀가며 범신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섬세한 조각가의 손길에서 태어난 듯 비현실적으로 고요한 흰 얼굴. 그 속에서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유난히 검게 빛나는 눈동자. 아까까지 웃고 있었다는 걸 잊을 만큼 순식간에 싸늘해진 분위기. 확실해졌다. 기도문을 읊는 범신의 목소리가 커지고, 그에 따라 준호의 입꼬리는 사르르 올라갔다. 신부님 뭐하세요? 라고 묻는 준호의 목소리가 이리 이질적이었나.




 Sancte Michael archangele defende nos in proelio,……


 제게 이런 걸 들려주시는 건가요, 신부님? 아아, 저도 신부님께 들려주고 싶은 구절이 생각났어요.


 contra nequitiam et insidias diaboli esto praesidium……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


 Imperet illi Deus…….




 성 미카엘의 기도문을 읊던 범신의 목소리가 끊겼다. 살살 웃으며 준호가 내뱉은 저 구절을 어찌 잊을 수가 있으랴. 등골을 훑고 지나가는 싸늘한 기시감에 범신의 눈빛은 매서워졌다. 그 위압적인 눈빛에도 아랑곳 하지 않는 준호는 붉은 혀를 살짝 내밀며 아랫입술을 훑고선 마저 구절을 내뱉었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버렸다.




 이시야 49장 4절.




 그러나 내 권리는 나의 주님에게 있고, 내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

 



 살아생전 정기범 신부님이 가장 좋아하시던 구절. 그때처럼 구절을 맞받아친 범신은 굳게 입을 닫아버렸다. 꿈쩍도 안 한다. 단순히 기도문만 가지고 해치울 녀석이 아니었다. 끝까지 자신의 손으로 마무리해야 했었다. 문득 검은 이빨과 검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제게 저주를 내렸던 악령의 말이 뇌리를 스쳤다.




 너는 4년 뒤 감옥에서 피를 토하며 죽을 것이고!




 그래, 그때 그 저주인가. 드디어 풀려진 모든 의문의 끝에 자리 잡은 썩어버린 핏덩이의 존재에 마냥 후회할 수 없었다. 두려움에 도망가더라도 다시 돌아올 줄 아는, 굳건히 맞설 줄 아는 어린 범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가토.




 범과 같은 기백으로 범신은 불러보았다. 그에 정갈한 자세로 가슴에 손을 올린 준호는 뱀과 같은 미소로 대답하였다.




 네, 여기 있습니다.




 ―그곳에 아가토는 없었다.